그렇게 동로마가 서로 황위 쟁탈전을 벌이면서 내부에서 물고 뜯어먹는 개판의 상황에서 716년, 레온 3세의 반란을 통해 동로마는 다시 국력을 회복하기 시작한다.
유스티아누스 2세의 복위를 도우면서 실세로 떠올랐던 그는 망나니같이 전쟁을 즐기고 잔혹했지만 나름대로 제국의 물류와 개혁에 관심이 많았던 유스티아누스 2세의 영향을 많이 받았고, 즉위식을 마치자마자 제국 내의 사절단을 소집한다.
레온 3세)일단 제국 내의 백성들의 수와 도로의 정비 상태, 테마(당시 로마의 지역구들을 일컫는 단어다. 지금으로 치면 예비군이 되는 둔전병들을 관리하기 위해 만들어진 개념이다.), 제국 내의 농민들의 경제 수준을 다시 집계해주십시오. 사절단들)허나.. 지금 이걸 다시 정리한다면 어떻게 정리를.. 레온 3세)일단 각 도시별 인구들의 수입을 기준으로 정리해주십시오. (참고로 이 사람이 제안한 정리법은 양입제출이고, 레온 3세는 현대의 재무재표의 기본적 개념을 정립한 사람임.)
그렇게 제국 내의 다양한 도시를 돌아다니면서 제국 시민들의 삶의 질에 따라 세금과 소금 등의 기본재 투입에 신경을 쓰기 시작한다.
하지만 그의 개혁은 즉위 1년도 채 되지 않아 바로 위기에 직면한다.
우미이야 칼리파국이 대규모 병력을 이끌고 쳐들어왔고, 콘스탄티노폴리스를 포위한 채 공성전을 치르기 시작한 것이다. (이 사건을 훗날 제 4차 콘스탄티노폴리스 공방전이라 불리게 된다.)
당시 동로마는 상황이 급박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우마이야 해군이 대규모의 함선을 투입하여 콘스탄티노폴라스 근방의 해역을 포위하였고, 이로 인해 캅카스 지역의 군량품들을 조달받지 못할 위험에 직면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이런 상황에서도 동로마군의 상황이 마냥 불리하진 않았는데, 레온 3세가 즉위하기 직전 불가르 칸국과의 평화 협정을 통해 불가르 칸국의 원군들이 콘스탄티노플을 중심으로 집결했고, 당시 동로마는 흉악한 비밀병기를 하나 가지고 있었다.
아마 세계사를 공부한 사람들은 한번씩은 들어봤을 '그리스의 불'이었다.
해전에서 물로 꺼지지 않는 이 지옥불을 사용했던 동로마군은 우마이야 칼리파국에게 말 그대로 불지옥을 선사했고, 결국 해상봉쇄를 뚫어내면서 수성전에서 유리한 위치를 가져갈 수 있었다.
그렇게 해상 봉쇄를 우마이야 칸국이 시도하면 동로마군은 이를 풀어내길 반복했고, 그렇게 시간이 지나 겨울이 닥쳐오기 시작하자 우마이야 칸국의 병력들이 기아나 동상에 시달리기 시작한다.
이에 계속된 병력을 투입했지만 동로마 해군의 기습과 불가르 칸국의 게릴라전으로 인해 병력손실이 극에 달하게 되었고 그 수는 현재로 추산치 30만명 정도였다고 한다. (그리고 이 수치는 이슬람의 PTSD 자극제가 되고, 이후 등장할 도끼 성애자 왕과 함께 현재도 무슬림들의 악몽으로 통한다.)
결국 더이상 전쟁을 지속할 수 없겠다고 판단한 우마이야 칸국은 배를 통해 귀환하게 되는데 불행은 또 겹쳐서 그들을 망국의 구렁텅이로 몰아넣게 된다.
산토리니 화산이 귀환 도중 폭발하게 된다. (이 시대에 로또가 있었으면 진지하게 사보라고 권유했을 듯.)
그 후 우마이야 칼리파국은 약소화가 진행되기 시작되었고, 결국 747년 무함마드의 친척에 의해 멸망을 직면하게 되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