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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옵지문학] 내가 인형뽑기를 하는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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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서른 한살이다. 나는 인형뽑기를 한다.

서른 한살의 적지 않은 나이임에도 나는 남들이보면 유치할 수 있는 인형뽑기를 한다.

비웃어도 좋다. 당신들에게 인형뽑기가 한줄기 희망의 가닥이었다면 과연 비웃을 수 있을지는 의문이지만.

 

 

2015년의 겨울은 유난히도 추웠다.

스물 아홉 시절의 나는 또래에 비해 턱 없이 수입이 적었다.

대학원 연구실에서 한달에 받는 수입 70만원. 그게 나한테 주어진 전부였다.

휴대폰비를 내고 각종 생활비로 지출하면 그저 죽지 않을 만큼의 돈이었다.

공대생들은 알겠지만 공대에서 대학원을 다닌다는건 밤낮없이 개처럼 노예생활을 한다는 말과 같다.

넉넉치 않은 주머니 사정에 대학을 졸업하고 S전자, L전자 등에 취직한 친구들을 자주 만나기도 어려웠다.

얻어먹는것도 하루이틀이고 내가 선택한 대학원 생활이기에 염치 없이 굴기도 싫었다.

 

 

힘든 하루 하루를 보냈지만 나에게 힘을 주는 한 사람이 있어서 이 악물고 버틸 수 있었다.

지금이야 오피지지 커뮤니티가 생겨서 같이 만나면 "이거봐라 얘는 영어 스펠링도 모른다?", "이거봐봐 얘네 또 ㅈ벤마냥 한심하게 싸운다?"

등 다양한 이야기도 할 수 있고 오피지지 전적검색을 통해 어젯밤 같이 한 칼바람 전적을 보며 누가 잘했는지 자랑도 할 수 있지만,

커뮤니티도 없었을 뿐더러 피씨방 갈 돈도 없던 그 당시에는 그저 커피 한잔 시키고 서로의 눈을 보며 대화하는게 전부였다.

나만 바라보고 응원해주는 그녀. 그녀의 웃음을 보면 그 간 쌓여왔던 나의 울분과 분노는 눈 녹듯 사라졌다.

어느 연인들처럼 우리의 시계도 똑딱똑딱 흘러갔고 달력을 넘기다보니 기념일이라는게 다가왔다.

다른 연인들에겐 행복만이 가득한 기념일이지만, 나에겐 걱정과 부담으로 다가왔다.

 

 

그녀 역시 나의 주머니 사정을 잘 알았기에 평소 데이트 비용도 대부분 그녀가 부담했다.

기념일 역시 속 깊은 그녀는 알고 있었으리라. 기념일을 며칠 앞두고 "오빠 나는 아주 작은거보다 조금 큰 인형을 선물받고 싶어."

라고 나에게 얘기해주었다.

전화를 끊고 나는 대성통곡 할 수 밖에 없었다. 흐르는 눈물을 멈출 수 없었다.

그녀의 깊은 마음씨에 감동하기도 했고, 2~3만원을 하는 인형을 살 능력도 없는 현실에 낙담하기도 했다.

 

 

그렇게 기념일이 다가오고 있을 때, 신촌의 Z 오락실에 인형뽑기 기계가 설치되고 있었다.

그렇게 내 사랑 그녀가 원하는 크기의 설인같은 트롤 인형들이 잔뜩 있는 인형뽑기 기계를 마주하게 되었다.

담배를 끊겠다는 다짐과 함께 5000원을 넣었고, 운이 좋게도 마지막 기회에 예쁜 인형 하나를 뽑을 수 있었다.

탑 쌓기와 같은 개념을 몰랐던 그 때는 흔히들 말하는 '랜덤파워'가 작동했었던 것 같다.

그렇게 담배값을 대신해서 그녀를 위한 인형들을 뽑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허탕친 적도 있지만, 차츰 인형뽑기를 뽑는 요령을 익히게 되었다.

어느정도 요령이 생기니 4000원 정도면 괜찮은 인형 하나씩을 뽑을 수 있었고,

내가 인형을 뽑으면 주위에 사람들이 모여서 인형 잘 뽑는 법을 구경하기까지 했다.

그렇게 나의 추웠던 겨울이 지나고 봄이 찾아왔다.

 

 

이제 서른 한살의 나는 대학원을 졸업하고 어엿한 직장에 다니고있다. 2~3만원짜리 인형을 200개정도 살 수 있는 월급을 받고있다.

하지만 20대의 나를 생각하면서 오늘도 그녀를 만나기 전 인형뽑기 기계 앞을 서성인다. 나에게 한줄기 희망이었던 그 인형뽑기 기계 앞에...

 

"자기야 오늘은 5000원에 두개나 뽑았어! 잘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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