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은 쌀쌀하다. 뺨을 스치는 날카로운 칼바람에 입술이 오그라든다. 해바라기가 땅을 메운 광활함에 기억이 소스라치려고 한다. 물론 떠오른 것은 없었다. 머리가 저릿하고 손에 뺨이 차지만 떠오른 것은 없었다. 눈을 꾹 감았다. 금방이라도 떠오를듯한 희미한 인상 앞에서 무릎을 꿇었다. 왜 떠오르지 않는지 기억조차 없다. 의지 또한 결의로 이어지지 못한다. 난 자리에 주저앉았다. 떠오르리라는 기대는 저버린 지 오래다. 한숨이 푹 쉬어진다. 입에서 새어 나오는 것이 이런 것밖에 없었다. 차가운 한기 속에서 한숨은 하얗고 희미한 것으로 떠다닌다. 바람은 싸늘하면서도 따스하다. 태양 빛이 해바라기를 향해 내리쬔다. 아니 해바라기가 태양을 향해 바라본다. 나도 왠지 모르게 태양을 바라봤다. 눈을 찌르는 빛이 오로라처럼 흩어졌다. 태양의 형체는 다양한 빛깔로 날 감싸 안았다. 그 순간 머리가 저릿했다. 떠오르지 않으리라 기대를 져버렸던 기억이 뇌리를 스쳤다. 신경은 물결처럼 흘러내려 손의 감각으로 느껴졌다. 바람은 싸늘하면서도 따스했다. 내 옆에 여자가 물었다. 그녀는 흰 원피스를 입고 있었다. 내가 해바라기밭에서 만나자고 한 것을 아마도 소풍이라도 가자는 의미로 받아들인 듯했다. “그래서 여기로 왜 부른 거야?” 순수하게 짝이 없는 그 여자는 내게 물었다. 난 내 이념을 덧없이 털어놨다. “난 태양을 바라볼 거야. 난 태양을 좇고 싶어.” 여자는 의아한 표정이었다. 언덕의 끝에서 길게 늘어진 해바라기밭을 바라보던 그녀였다. 난 그녀의 옆에서 태양을 바라보고 있었다. 어깨까지 내려온 그녀의 긴 생머리가 따스한 바람에 찰랑거렸다. “무슨 소리야?” 예상한 대답이었다. 대답이자 물음인 그 말에 대해 사실 난 적절한 대답을 준비하지 않았다. “그냥. 그렇다고. 해바라기밭에서 태양을 바라보면 그런 느낌이 들어.” 그녀는 심술궂은 표정을 지으며 내 옆구리에 주먹을 꽂았다. “윽. 아프다….” “그러니까 왜 대지도 않는 말을 해….” 그녀의 꾸지람에 난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손이 저렸다. 이 순간에서 그 말을 꺼낸 순간, 아니 그 전부터 그 말을 떠올린 순간부터 손은 저렸다. 선택의 갈림길이란 것은 없었다. 오로지 앞을 나아갈 뿐이었다. 이 순간에서 난 말 해야만 했다. 침을 꾹 삼키고 목에 깊이 박힌 응어리를 내뱉었다. “…태양을 좇아 줘….” “엥?” 그녀는 진심으로 놀란 표정이었다. 처음은 그냥 뭣 잘못 먹은 말이라고 믿는다 해도 이번 건 아니었다. 난 고개를 떨궜다. 표정은 이미 슬펐다. 그녀는 목을 잠깐 어루만지다 물었다. “그러니까…무슨 소리냐고!” 그녀는 나에게 소리쳤다. 난 묵묵부답이었다. 조용히 고개만을 숙이고 있었다. 태양을 향해 고개를 쳐드는 해바라기와는 달랐다. “꼭…태양을 좇아야 해….” 난 그저 이 말만 했다. 더 할 말은 떠오르지 않았다. 흐름은 내 머릿속에서 오로지 태양으로만 향했다. 의식은 어디서나 그 끝은 태양이었다. 그녀는 나의 말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짐작했다는 듯 입을 꾹 닫았다. 마음 깊이 이젠 언제쯤 풀릴지 모를 족쇄를 채운 것이다. 그렇지만 그런 나도 그 끝은 좇지 못하고 바라보지 못하고 끝내 도달하지 못 할 거란걸 잘 알고 있다. 그 기억을 잊으리란 건 나도 이미 가슴속에 박아둔 상태였다. 무엇보다 날카로운 비수가 내 가슴 깊이 박혀있었다. 날카로운 찬바람이 그녀의 머리카락을 흩트렸다. 그날은 그녀와 난 집으로 돌아가는 길 어떠한 대화도 나누지 않았다. 난 고개만을 숙이며 걸었고 그녀는 줄곧 한 번씩 날 돌아봤지만 난 아무런 반응조차 없었다. 결국 우린 어느 한 길가에서 헤어졌고 다신 만나지 못했다. 난 기억을 잃었으니까. 난 태양을 향해 고개를 쳐드는 해바라기를 보았다. 이마에 땀이 새어 나왔다. 바람의 흐름이 내 머리카락을 단정하게 만들었다. 그녀의 기억이 내 손과 어깨 그리고 머리카락을 스쳐 갔다. 그녀는 태양을 좇았을까. 난 해바라기밭 사이를 걸었다. 그녀가 꼭 바라던 그것을 이루었을까. 태양이 나를 내리쬤다. 차가웠던 바람은 어느새 따스해졌다. 그리고 익숙한 얼굴이 내 앞을 가렸다. 그 얼굴엔 눈물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내 손엔 또 한 번 땀이 찼다. 왜일까. 왜 그녀가 다시 나타난 걸까. 어떻게 날 찾아낸 걸까. “왜…….” “네가…만나자고 했잖아…태양이라는 날에 만나기로 했잖아…. 네가 내 태양이 그것이라고 했잖아….” 난 대답하지 못했다. 기억이 안 났으니까. 내 기억은 은연중에 떠오른 그녀와의 조각뿐이었으니까. “기억이 나지 않는 거야……?” 그녀의 눈에서 언제부터인지 눈물이 흐르고 있었다. 난 대답 할 수 없었다. 기억이 없었으니까. “…내가 기억나게 해줄게…그러니까…제발……포기하지 말아줘….” 난 어떻게 대답해야 하는 걸까. 다리가 암석처럼 굳어버렸다. 발에서 새어 나온 땀이 양말로 스며들었다. 그녀의 볼을 타고 내린 눈물도 따스한 땡볕 아래의 땅으로 스며들었다. 솟구쳐 나오길 비는 기억은 이젠 되찾을 수 있을지 모르는 불명이었다. 따스한 바람이 스쳐 갔다. 지금 난 뭘 하는 걸까 어디에 있는 걸까. 방금까지 떠오른 기억도 이젠 잊어버렸다. 아니 애초에 기억하고 싶지 않은 것일지도 모른다. 그녀는 입술을 깨물고 있었다. 인제 보니 그녀의 복장은 우리가 만났던 그때처럼 흰 원피스를 입고 있었다. 내 나이가 몇이더라. 그래 지금 난 스물넷이다. 그녀와 만났던 게 언제였더라. “나랑…태양을 좇기로 했잖아….” 내가 왜 여기 있더라. 내 손이 떨렸다. 이 이유만큼은 꼭 찾아야 했다. 난 떨리는 다리에 힘을 주었고 부들대는 손을 주먹을 쥐었다. 그녀의 목소리는 떨렸다. 그녀는 아마도 내가 기억을 떠올리길 바라는 것 같았다. “이날이잖아….” 그녀의 숨은 다시 한번 새어 나왔다. 눈물과 태양이 져가는 황혼에 가려져 숨은 어느새 갈라진 채 새어 나오고 있었다. 그녀는 고개를 숙였다. 흐느끼는 소리는 내가 서 있는 이 자리까지 들려왔다. 그녀의 손은 불안정하게 꼼지락거렸다. “이날이잖아……….” 정적이 바람에 실려 내 가슴까지 다가왔다. 다시 한번 숨이 갈라졌다. 이번엔 내 숨이었다. 바람이 느리게 스치는 것 같았다. 해바라기가 받아내는 빛이 어째서인지 날 비추는 것 같았다. 기억이 떠올랐다. 달력에 써진 그 글자를 보며 난 다짐을 하지 않았는가. 태양을 좇기로 내가 가장 바라고자 했던 것이 있는 곳으로 찾아가기로 했다. 그리고 나도 모르는 내가 가장 바라던 것이 내 앞에 있다. 내 가슴 깊이 박혀 있던 비수는 움찔거렸다. “내가…꼭…기억나게 해줄게…행복했던 나날을 떠올리게 해줄게….” 그 순간 그녀의 말이 내 귓속에 박힐 순간 난 볼 수 있었다. 그녀의 가슴에 나와 같은 비수가 박혀 있다는걸. 난 푹 숙이고 있는 그녀를 향해 다가갔다. 난 그녀의 앞에서 그녀의 손을 맞잡았다. 고개를 숙이고 있던 그녀는 놀란 눈으로 날 바라봤다. 그녀의 눈이 빛났다. 난 말을 이었다. 태양이 빛을 우리 둘을 감싸 안았다. 말이 내 목은 꽃처럼 만개했다. “같이…태양을 좇자….” 그녀의 눈물이 내 손에 떨어졌다. 뚝, 뚝, 차갑지 않은 따스한 눈물이었다. 태양을 바라고자 한 이의 따뜻한 마음이었다. 따뜻한 온기가 손끝부터 내 심장까지 느껴졌다. 그녀와 나의 가슴 깊이 박힌 비수가 뽑혀 나갔다. 그녀의 머리카락은 단정했다. 그녀가 내 말을 이었다. “꼭 이루자….” 해바라기가 언덕을 뒤 덮은 땅위에서 우리 둘은 손을 맞잡고 있었다. 서로의 태양을 좇기로 한 약속을 지금 이루게 됐다. 그녀와 난 돌아서 태양을 바라봤다. 해바라기들도 하나같이, 우린 언덕의 끝에서 태양을 바라보고 있었다. 따스한 바람이 우리 둘을 스쳐 지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