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이 지나고 따스한 햇볕이 내리쬐는 봄이 되었다. 다들 차츰 옷의 두께를 줄여나갔다. 이렇게 계절이 바뀔 때면 다들 하나같이 공방에 찾아오기 마련이다. 옷이 줄었을 수도 아니면 해졌을 수도 있었으니. 하지만 그웬 공방엔 요 며칠 오가는 손님이란 존재하지 않았다. 원래 그웬 공방이란 건물은 없었던 것처럼 그웬 공방에 오는 사람은 단 한명도 없었다. 그 그웬 공방 안은 거대한 실타래가 한구석에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거대한 실타래 앞으로는 책상이 놓여 있었고 그 책상 위엔 미싱 기계가 놓여 있었다. 아무도 찾아오지 않아 주인마저도 지루하고 칙칙해진 삶에 의기소침 해 질 무렵 그 책상 위엔 그 미싱 기계 위엔 그 실타래 위엔 먼지가 쌓여갔다. 그웬은 의자에 앉아 책상에 한쪽 팔로 자기 머리를 기댄 채 엎드려 있었다. 그러고는 그웬은 한숨을 쉬었다. 어쩌면 루시안의 말이 맞았을지도 모른다. 그웬은 여전히 이야기를 원한다. 하지만 루시안의 말대로 어쩌면 공방이라는 곳은 그다지 인간 세계에 필요한 부품이 아니었을지도 모른다. 그웬은 외로움이 심장을 태웠음에도 밖에 나가지 않았다. 어쩌면 누군가 이야기를 팔러 올 수도 있었으니. 그러니 그웬은 그 이야기를 듣고 싶어 공방에 나설 수 없었다. 그렇게 계절은 손님이 더욱 오지 않을 시간으로 넘어갔다. 정말 아무도 공방이라는 집에 들어갈 이유가 없어질 시간에 누군가 그웬 공방의 문을 열었다. 문이 열리는 소리와 함께 중후한 남성의 목소리가 들렸다. “안녕하십니까.” 그웬은 드디어 찾아온 손님에 생기가 돋으며 숙이고 있던 허리를 곧게 펴고 고개를 들어 올리며 손님을 맞이했다. “반갑습니다! …어?” 남자는 알 수 없는 가면을 쓰고 있었다. 입을 가린 마스크에 그 위는 눈만이 보이는 복면 같은걸 쓰고 있었다. 그러나 그 모양새와는 다른 색감이 보라색을 하고 있었다. 그웬은 혹시 남자가 기계는 아닐까 의심해 보았다. 상체를 두른 갑옷과 오른쪽 손등에 보이는 덩어리는 기계 병기를 연상하게 했다. “혹시…슈 리마 쪽 옷도 수선할 수 있으십니까?” 그웬은 처음 보는 사람의 모습에 당황해하다 답했다. “그…그야 가능하죠! 그…근데 무슨 일로….” 남자는 잠깐 침묵하다 답했다. “그건 말할 수 없습니다.” 남자의 말에 그웬은 말을 얼버무렸다. “그…그래도 여긴 이야기를 팔아야 수선을 해주는데요….” 그웬은 말끝을 흐렸다. 남자한테 위협감이 느껴지지는 않지만 그런데도 남자는 무장 중인 것 같았다. 혹시나 남자랑 싸우게 되면 그웬은 거대한 가위 없이 싸워야 했다. “…이야기요…?” “네….” 남자는 약간 고개를 숙였다. 그리곤 잠깐 생각에 빠진 듯 침묵하다 답했다. “이건…제 딸의 마지막 옷입니다….” 그 말과 함께 남자는 허리 줌에 차고 있던 가방 속에서 옷가지를 꺼냈다. 몇몇은 너무 해져 수선이 불가능해 보였다. 남자는 책상 위엔 옷들을 펼쳐 놓았다. 그웬은 그 중 딱 하나만이 수선이 가능하단 걸 깨달았다. 그웬은 착잡한 마음에 잠깐 입을 다물다 이내 다짐하곤 다시 입을 열었다. “수선은… 저것 하나만 가능해요.” 그웬은 손가락으로 책상 위에 놓인 옷들 중 하나를 집헜다. 황토색에 반짝이는 돌들이 장식된 옷이었다. 그웬은 다시 말했다. “이야기는….” “해주겠습니다….” 남자는 의자에 털썩 주저앉았다. 그웬은 남자랑 마주 보도록 의자에 살포시 앉았다. 남자는 마스크를 벗으며 입을 열었다. “제 이름은 카사딘입니다. 절 아시나 모르겠지만…전 공허를 배회합니다. 제 딸과 아내를 살해한 남자를 찾기 위해 배회를 하는 겁니다.” 그웬은 카사딘의 말에 놀란 표정을 지었다. 생각 한 것보다 더 무거운 이야기에 그웬은 약간 긴장하게 됐다. “제 손등의 무기와 마스크…그리고 갑옷들 모두 제가 공허에 들어가기 위해…남자에게 복수를 위해 모았던 겁니다….” 카사딘은 한숨을 쉬었다. “평소같이 공허를 돌아다니고 있었습니다. 아무것도 없어 보이는 곳에서 무언가를 찾아다니고 있었습니다.” 카사딘은 다시 한번 무거운 짐을 들어 올리듯 한숨을 쉬었다. 그의 가슴 속엔 여전히 그 무게가 느껴졌다. 그런데…어디선가 인간의 목소리가 들려왔습니다. 처음 듣는 목소리였습니다. 그런데…그때 서야 뭔가 깨달았습니다. 인간이라는 존재를 잊고 있었단 걸. 제가 아직 딸을 떠나보내지 못했단 걸. 아직도 제 안에서는 딸이 마치 제가 공허를 배회하듯 떠돌이가 되어 있다는 걸.” 카사딘은 죄인처럼 고개를 푹 숙였다. “사실…이야기해야 수선을 해준다는 소문을 듣고 일부러 찾아온 겁니다…. 어쩌면 그 목소리가 제 딸의 목소리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어이가 없죠….” 남자는 한숨을 쉬었다. 남자의 눈동자에 추억이 어른거리는 것 같았다. 딸에게 이 옷을 선물해주던 기억이 카사딘의 눈을 지나쳤다. “전 단 한 번도 딸아이 생각을 못 했는데. 복수에 빠져 살고 있었는데…. 그제야 딸 생각을 한 겁니다…. 제 죄를 누군가에게 털어놓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찾아온 겁니다.” 카사딘의 고해성사와는 다르게 그웬의 얼굴은 분명 화나 있는 것 같았다. 팔을 바짝 편 채 몸에 붙이고 있었다. 배은망덕한 사람을 본 것 같이 표정을 짓고 있는 그웬에 카사딘은 그웬의 표정을 수용하듯 말했다. “이해합니다…. 전 나쁜 인간인 거에요….” 그 말에 그웬은 더 씩 씩 거렸다. 참을 수 없다고 느낀 그웬은 의자에서 벌떡 일어서곤 소리쳤다. “이 옷들을 가지고 다녔던 것만으로도 당신은 이미 좋은 사람인 거라고요!!” 카사딘은 놀란 마음에 숙이고 있던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눈빛이 흔들리며 기억이 그의 가슴 속을 요동치게 하고 있었다. “딸에게 미련을 버리지 못했으니까. 아직도 딸아이가 보고 싶으니까 그러는 거 잖아요!! 당신은 딸아이를 버리지 않았다고요!” 카사딘은 그웬의 말에 고개를 숙였다. 그웬의 말이 카사딘의 마음의 무게를 모두 걷어차 버리는 듯했다. 그 때문이었을까 카사딘은 천천히 눈물을 흘렸다. 카사딘의 눈물은 칙칙하던 그웬 공방에 온기를 더하듯 마룻바닥에 흡수됐다. 공허에 배회하며 그 누구보다 공허해 보이던 이는 공허하던 그웬 공방에 가듯 메우고 있었다. 활기가 아닐지라도 연민이라는 감정이 비애라는 감정이 그웬 공방을 메우고 있었다. 그웬은 슬며시 자신의 눈사이에서 빠져나오는 눈물을 느낄 수 있었다. 그웬은 다시 소리쳤다. “당신은 딸을 꼭 찾을 수 있어요. 딸이 있는 곳에 가서 그 옷을 주란 말이에요!” “어떻게…딸이 죽은 곳을 찾는단 말이에요….” 카사딘은 여전히 고개를 숙인 채 흐느끼고 있었다. “으으…제 실을 쓰면 찾을 수 있다고요! 그러니까 그만 울어요!” “실…로요?” 드디어 진정된 듯한 남자의 모습에 그웬도 북받쳐 오르는 감정을 억누르며 말했다. “후…맞아요 다행히도 제 실은 무언가를 찾아줄 수 있죠.” 카사딘은 놀란 눈으로 자신 앞에 서 있는 그웬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그웬은 수선이 가능한 단 하나의 옷을 집었다. 그리고 카사딘에게 말했다. 오직 단 하나만이 남은 가능성의 선택에 카사딘은 딸과 아내가 죽은 이래 처음으로 다시금 가슴이 떨리기 시작했다. “제가 이 실로 옷을 꿰맬 거예요. 기다리세요. 금방 만들어 드릴 테니까!” 그 말과 함께 그웬은 미닫이문을 열어 다른 방으로 들어갔다. 카사딘은 기적이 일어난 것 같은 현실에 마음을 다잡을 수 없었다. 갑자기 자신 앞에 나타난 기적이 꼭 이루어지길 빌며 카사딘은 자신이 져버린 딸을 꼭 찾길 진심으로 바랐다. 잠시 후 그웬은 수선된 옷을 가지고 나왔다. “여기 있어요. 이 옷은 딸이 있는 곳으로 바람이 흩날리는 것처럼 흔들릴 거예요.” 카사딘은 어릴 적 딸이 입던 옷과 똑같아진 옷을 받으며 말했다. 정말 딸과 함께 있을 것만 같은 옷에 카사딘은 그 모습을 눈에 다 담기 힘들었다. “감사합니다….” 카사딘은 자신을 진심으로 도와준 사람이 그웬 말고 있었는가 돌아봤다. 아무도 없었다. 자신을 위해 무언가를 준 것은 오직 자신이 비용을 지불했기 때문이란걸 잘 알고 있었다. 그웬이 보이지 않도록 고개를 숙인 채 눈물을 흘리며 카사딘은 옷을 받고는 그웬 공방에서 나왔다. 더럽고 진액이 넘쳐나고 살아 있는지 죽어있는지 모르는 자들이 서로 죽이고 죽이는 더러운 자연 세계에 꿈틀거리는 곳에서 카사딘은 너울처럼 흩날리는 옷을 따라 걷고 있었다. 그리고 마침내 카사딘은 자신 앞에 서 있는 인간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긴 장발이 어깨까지 내려오는 머리를 한 여자의 모습이 보였다. 그리고 옷은 그 여자를 향하고 있었다. 카사딘의 손이 떨리고 있었다. 딸을…죽어 있는 시체로 맞이 할 줄 알고 있었던 카사딘은 아직도 아니 오히려 건강하게 서 있는 딸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공허와 한 몸이 된 듯 했지만, 아무런 상관없었다. 오직 자신의 딸이기만 하면 된 것이다. 카사딘은 천천히 인간 여자를 향해 걸어갔다. 터벅터벅 더러운 공허 덩어리가 땅을 이루는 곳을 밟아 가며 카사딘은 둘 사이의 거리를 좁혀 나갔다. 영원히 떨어져 그 거리가 얼마인 줄 몰라 절대 다가갈수 없을 거라 믿던 딸과의 거리는 현실처럼 그 마음 사이의 거리고 좁혀가기를 빌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