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선조 사후 광해군 1년(1609년) 임진왜란 때 불탔던 창덕궁이 완공
창덕궁 복원공사가 드디어 완료됐습니다. 전하 이제 입궐하시는 게 어떨는지요?
ㄴㄴㄴㄴ
????? 아니 정궁이 다 완공되었는데 입궐하지 않겠다니요???
제대로 보긴 했나? 이쪽 수리하고, 저쪽 수리하고 곳곳에 하자 투성인데 거기에 입주하라고??
(아오... 뭔 트집이실까?) 예... 일단 더 손을 보겠습니다.
ㅇㅇ, 보강공사할 때까지 정릉동 행궁에 계속 있는다. 물론 창덕궁뿐만이 아닌 창경궁까지 공사가 완료되지 않았던 시점이라 왕실 인원 전부가 이어하기엔 문제가 많기도 했다. 아무튼 그렇게 창덕궁의 보수공사를 명하고 2년 뒤인 1611년 10월, 드디어 광해군은 창덕궁으로 이어한다. 그리고 기존에 거처했던 정릉동 행궁은 그 이후 경운궁(덕수궁)이라 부르게 된다. 그리고 창덕궁으로 이어한 지 2달 이후...
다시 경운궁으로 옮겨. 아니??? 대체 왜요?
여기 창덕궁은 예전에 노산군(단종)도 폐위되고, 연산군도 폐위된 곳 아냐?
그렇사옵니다만... 그니까 불길하다고, 터가 안 좋아
전하, 다시 생각해주시옵소서. 토옹촉하여...
닥치고 재이사 ㄱ 그렇게 광해군은 두 달만에 다시 경운궁으로 옮겨갔다. 경운궁으로 옮겨가서는 또 어떻게 하냐면... 경운궁 자체가 너무 허하다. 전각들 좀 지어라.
아니 경운궁은 별궁이지 않습니까? 굳이 확장공사가 필요합니까?
업무 보는데 차질 있어서 전각들 좀 짓겠다는 것인데 뭐 문제 있는가?
(이럴 거면 창덕궁으로 계속 계시지...;;) 그리하여 경운궁은 이때부터 전각의 동수와 궁궐 자체의 규모도 더 키워나가기 시작했다. 그러나 기거 중 이어진 악재(봉산-계축옥사)로 광해군은 1615년 4월, 다시 창덕궁으로 환궁 한편으로는 그 사이, 창경궁의 복원공사도 다 마무리된다. 이후 광해군의 고질적인 궁궐병은 더더욱 심화되는데...
만약에... 만약에 말이다.
정궁으로 쓰고 있는 이 창덕궁에 화재가 난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경운궁 쓰면 되지 않겠습니까??? 그건 별궁이지 않나? 내 말은 정식 이궁이 필요하다 이 말이야. 조선초 법궁이었던 경복궁과 이궁이었던 이 창덕궁처럼 말이야.
이궁이 차후 필요하긴 합니다만... 왜란의 혼란도 차마 가시지 않은 이 시기 지금 그걸 꼭 지어야만 하겠습니까?... 옥사 한번 맛봐보실?
알겠습니다... 그럼 어디에 짓는 것이 좋겠습니까? ※ 검은 원이 인경궁(仁慶宮) 터로 추측되는 곳 인왕산 자락에 왕기(王氣)가 흐른다 하니, 그곳에 지어라. 이렇게 광해군 9년인 1617년, 사직의 오른편에 인경궁 공사가 시작된다. 또 사치스럽다는 이유로 여태 쓰지 않던 청기와, 황기와가 사용된다. 인경궁의 유일한 흔적인 창덕궁 선정전 - 청기와 건물 ※ 본래 인경궁의 전각, 1647년 창덕궁 중수 때 인경궁에서 그대로 옮겨옴 특히 청기와는 그 제작에 있어 드는 비용이 엄청났다. 다음과 같은 기록들에서 이를 확인해 볼 수 있다. "청기와에 드는 비용 역시 이루 말하기가 어려울 정도입니다. 만약 2백 눌을 만든다면 3만 근의 염초를 써야 하는데..." 『광해군일기 중초본』 126권, 10년 4월 10일 기해 14번째 기사, 1618년 명 만력(萬曆) 46년 * 특히 염초는 화약의 원료로 이순신 장군께서도 그 확보에 무수한 공을 기울인 원료였다. "신의 군관 이봉수가 그 묘법을 알아내어 3개월 동안 염초 천근을 끓여낸 바로써..." 이순신 『임진장초』, 1593년 1월 26일 그러나 이랬음에도 불구하고 광해군은 청기와 고집을 멈추지 았았다. 영건도감(궁궐공사 담당기관)에서 아뢰기를 청기와를 더는 만들 수 없다고 합니다...
청기와 만드는 일을 어떻게 정지할 수 있겠는가. 그대로 만들도록 하라. 그리고 이 기와는 구워내고 나면 바로 벗겨지고 떨어져 청색이 다 없어져 버리니, 앞으로 금계군(錦鷄君)과 더불어 【금계군은 바로 종실 중에 무식한 사람으로 잡예(雜藝)가 많은 자이다. 】 서로 의논하여 정밀하게 만들어서 청색이 벗겨지지 않게 하라.(실제로 한 말) 『광해군일기 중초본』 150권, 광해 12년 3월 21일 기해 4번째 기사, 1620년 명 만력(萬曆) 48년 청기와 제작에 필요한 염초는 보통 중국에서 사 왔는데 그 과정에서 무수한 사회적-경제적 비용이 들어갔음은 설명할 필요도 없다. 그런데 여기서 그치지 않고 광해군은 인경궁 외에도 경덕궁(慶德宮, 훗날의 경희궁)과 자수궁(慈壽宮) 공사도 벌인다.
정원군(광해군의 이복동생, 인조의 아버지)의 돈의문 근처 옛집에 왕기(王氣)가 흐른다 하던데... ?????
그 저택 부지를 모두 몰수하고 새 이궁(경덕궁)을 지을 것이다. 또한 북악산 언저리의 왕기(王氣)를 막기 위해 자수궁도 세울 것이야!
(하... 그만하세요... 제발...) 이렇듯 광해군의 궁궐병은 심각했다. 그런데 당시 국가재정은 왜란으로 파탄난 직후다. 그렇다면 그 재정의 충당 방법은? ... 재정 어렵다고 왕실 권위 세우는 걸 포기할 수 없지.
조도사, 독운별장을 파견해 백성들을 쥐어짜 봅시다. ㅋ "일을 책임진 사람들이 백성들의 원망과 고통은 생각지 않고 으레 침노하여 빼앗는 것으로 능사를 삼습니다." 『광해군일기 정초본』 78권, 광해 6년 5월 17일 무진 1번째 기사, 1614년 명 만력(萬曆) 42년 "지금은 묵은 곡식이 다 떨어져서 백성들은 곤궁하고 재물은 고갈되어 조석조차도 급급합니다." 『광해군일기 중초본』 114권, 광해 9년 4월 18일 임자 9번째 기사, 1617년 명 만력(萬曆) 45년 "경기와 삼남의 쇠잔하고 곤궁한 백성들의 노역에 지칠대로 지쳐서 거의 다 떠나버렸으니, 장차 어디에서 징발하겠습니까?" 『광해군일기 중초본』 138권, 광해 11년 3월 13일 병신 9번째 기사, 1619년 명 만력(萬曆) 47년 "독운별장 우찬순은 독운의 일을 핑계삼아 사족의 집에 마구 들어가서 부녀자를 강간하고 심지어 상가의 궤연을 버젓이 철거시키고 음행을 하는 장소로 삼았습니다." 『광해군일기 중초본』 186권, 광해 15년 2월 5일 을축 1번째 기사, 1623년 명 천계(天啓) 3년 심지어 당시의 호남과 함경도 일대에는 기근도 겹쳐서 나라 망하기 일보직전... 그런데 광해군의 행보는 여기서 또 그치지 않는다.
경복궁 부지가 참 넓군...
전하, 대체 무슨...?
그냥 간 거야. 왜?
가뜩이나 기공 중인 인경궁도 경복궁 이상급으로 공사하고 있는 마당에 경복궁까지 복원할 수는 없습니다. 백성들의 고통이 더욱 심해집니다... 걍 지어버려? 시끄럽게 하지말고 입 다물어.
(.......;;;;;;) 이런 상황에 대한 당시 인물들의 평 "나는 도둑질하는 신하고 하루를 이 자리에 있으면 하루의 죄악을 더할 뿐" 당시의 조도사 이창정 "사관은 논한다. (중략) 더구나 지금 적당한 시기가 아닌데 크게 토목공사를 벌려서 국가의 재정이 탕갈되었는데 이겠는가? 그런데도 도감을 맡고 있는 자들은 매번 사치스럽고 크게 하기만을 일삼으며 일찍이 한 사람도 한 마디 말을 하여 폐단에 대해 진달하여 만분의 일이나마 폐단을 구제하지 않으니, 애석하도다." 『광해군일기 중초본』 116권, 광해 9년 6월 27일 경신 3번째 기사, 1617년 명 만력(萬曆) 45년 역시 당신이 옳았... 그냥 광해군은 폭군이 맞는 듯 -출처 인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