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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성에 대한 철학적 고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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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연 인간성은 무엇일까요. 정확히는 인간성을 무엇으로 정의할 수 있을까요. 사전적인 의미를 찾아본다면 인간의 본성, 혹은 인간의 됨됨이라고 나와있습니다. 하지만 제가 원하는 것은 그런 사전적인 것이 아니죠. 정확히 표현하기는 어렵지만 아마도 제가 묻고자 하는것은 짐승과 인간의 차이를 결정짓는 것일지도 모르고, 인성을 말하는 것일지도 모르고, 인간을 인간이라 결정짓는 무언가일지도 모릅니다. 결국 짐승과 인간의 차이를 결정짓는 것으로 생각이 좁혀지는 것 같군요. 그렇다면 인간과 짐승을 결정짓는 것은 과연 무엇일까요? 뛰어난 지능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요? 하지만 그렇다면 사자와 호랑이의 차이와 다를 것이 없습니다. 사자에게는 갈기가 있으나 호랑이에게는 갈기가 존재하지 않죠. 그럼 이건 사자성이라 불러야 하는 것일까요, 그렇지 않다면 호랑이성이라 불러야 하는 것일까요? 또한 지적장애를 앓고 있는 인간은 인간성을 지니지 않은 것일까요? 그렇다면 뛰어난 지능을 인간성이라 결정지을 수는 없겠군요. 그렇다면 이렇게 생각해봅시다. 짐승들은 공통적으로 지니고 있지 않으나 인간은 가지고 있는 것. 냉철한 이성? 혹은 정반대로 감정일지도 모르지요. 하지만 감정은 코끼리만 봐도 느끼고 있다는 것을 확신할 수 있으니 감정은 인간성이라 볼 수 없겠군요. 그렇다면 냉철한 이성은 어떨까요. 짐승들은 냉철한 이성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본다면 냉철한 이성이야말로 인간성이라 볼 수 있겠군요. 그렇다면 감정을 거세하고 AI처럼 완전히 모든 결과를 분석하며 살아가는 인간은 인간성이 있다고 볼 수 있을까요. 대부분의 사람들은 인간성이 없다고 말합니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요? 사실 이것의 답은 질문에 나와있습니다. AI같기 때문이죠. 그것도 너무나. 그렇다면 냉철한 이성 역시 인간성이라 보기 어려운 것일까요. 철학이란 어렵군요. 하지만 그 고통 뒤에 얻는 과실은 달콤할 겁니다. 그렇다면 이 만족지연능력은 과연 인간성이라 볼 수 있을까요? 사실 이에 대한 답은 간단합니다. 하지만 근거를 먼저 말하고 가도록 하죠. '기다려'훈련을 한 개들을 보시죠. 본능대로라면 바로 앞에 있는 사료를 먹었겠지만 기다리고 있습니다. 바로 만족지연능력이죠. 물론 이렇게 반박할 수 있습니다. 개들은 훈련받아 얻은 것일 뿐이다. 라고요. 음...과연 그럴까요? 지금 당장 책펴고 공부하는게 더 미래에 이득이라 생각하고는 있지만 이 글을 읽고 있는 사람이 분명히 있을테니 그렇게 말할 수 없을 것 같군요. 농담입니다. 진지하게 말하자면, 마시멜로 실험을 들 수 있습니다. 3~5세 아이들에게 마시멜로가 올려진 접시를 주고, 15분 뒤에 다시 올 때 까지 먹지 않으면 하나를 더 주겠다는 말을 하고 방을 나갑니다. 15분 뒤까지 마시멜로를 먹지 않은 아이가 10년 뒤 사회적 지위가 높아진다는 결과를 얻은 실험이지만, 제가 원하는 것은 이것이 아니죠. 이 실험은 다른 것 또한 시사합니다. 결과를 단정지을 수 있을 만큼의 아이들이 15분 이내에 마시멜로를 먹었다. 라는 것을 말이죠. 궤변이라고 말하실 수도 있겠지만,적어도 훈련으로 인간성을 가르칠 수 있다는 점 자체가 인간성이라 보기 어렵다는 생각이 드는군요. 정말 인간성은 확실히 정의하기 어렵군요. 인간성이란 존재하지 않는 것일까요. 그렇다면 지금까지 나온 것들을 뒤집어서 생각해보죠. 이번에 제가 인간성에 대한 정의로 제시할 것은 '본능을 거스름'입니다. 인간은 본능을 거스를 수 있습니다. 가장 우리 삶에 밀접한 예는 바로 자살이죠. 살 용기가 없어 죽는 '사회적 타살'이나 일부 맷돼지 종의 생물학적 특성으로 인한 죽음을 말하고자 하는 것은 아닙니다. 스트레스로 인한 자해와 자살은 짐승들도 하는 것이니까요. 하지만 짐승들은 아무 이유 없이 죽지는 않습니다. 적어도 사는게 지겹다던가 하는 이유로는 말이죠. 하지만 인간은 다릅니다. 죽음에 대한 두려움만 극복한다면, 아무 이유 없이 자살할 수 있으니까요. 물론 죽기 직전 살고 싶다는 생각은 들지도 모르겠지만요. 그렇다면 자살이야말로 가장 인간적인 행위라고 할 수 있는 것일까요? 하지만 자살은 인간이 인간이 아닌 고깃덩어리로 변모하는 과정 중 하나일 뿐입니다. 그렇다면 다른 예들을 찾아보죠. 밤을 샌다거나, 음식을 먹지 않는다거나, 성욕을 해소하지 않는다거나 같은 것 말입니다. 짐승들은 아무 이유 없이 그럼 행위를 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인간은 하죠. 왜냐고 물으면...글쎄요? 애초에 이유 자체가 없는걸요? 저는 성욕을 해소하지 않는 것을 중점으로 말하고 싶습니다. 인간은 365일, 혹은 366일 1년 내내 번식기라고 볼 수 있습니다. 다른 표현이 있긴 하지만 편의상 좀 더 천박하지 않아보이는 단어로 말하도록 하죠. 대부분의 짐승들은 번식기가 오면 짝짓기를 시작합니다. 이는 유전자에 내재된 본능으로, 자신의 유전자를 널리 퍼트리기 위해서이죠. 음...사실 이것도 좀 애매하네요. 가장 인간에 가까운 생물인 보노보의 사례를 보죠. 이들은 툭하면 짝짓기를 하지만 새끼는 5~6년에 한번씩 낳습니다. 이런 고도의 유희를 즐기기 때문에 비인간 인격체로 분류합니다. 사실 비인간 인격체 중에는 코끼리, 앵무새, 까치, 오랑우탄, 혹등고래 등 꽤나 다양한 생물이 분포하고 있습니다. 이들은 모두 다르지만 하나의 공통점이 있습니다. 바로 인격이 있다는 것이죠. 사실 당연하죠. 비인간 '인격체'니까요. 하지만 저는 그들과와도 다른 완전히 인간만이 가진 것을 인간성이라고 부르기로 말했으니까 그들과의 차이점 또한 찾아야 하겠지요. 그렇다면 다시 돌아와서 자살이야 말로 가장 인간성 있는 행위이며 인간성은 아무이유 없이 스스로 죽음을 택하는 것일까요? 사실 그럴지도 모릅니다. 생명체는 살기위해 태어나는 것이기 때문에 살아남는 것이 곧 본능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대부분의 인간은 그런 행위를 하지 않죠. 생존은 모든 생물체가 지닌 본능이고, 인간또한 마찬가지니까요. 그럼 다시 '본능을 거스름'에 초점을 맞춰보죠. 인간은 사회적동물입니다. 아무도 그것을 부정하지는 않죠. 그리고 사회적 동물 중에는 돌고래, 흰개미—흰개미는 바퀴벌레와 더 가깝습니다.—, 개미, 벌, 유인원류 등이 있지요. 그럼 일단 곤충들을 살펴볼까요. 벌, 개미, 흰개미는 고통점이 굉장히 많습니다. 여왕과 그 곁에서 다른 동족들이 사회를 유지하죠. 침입자가 침입하면 그들을 물리친 다는 것도 비슷하죠. 그렇다면 그들과 인간들의 차이는 다른 종과의 혼합일까요? 인간은 짐승들도 길들였으니 말입니다. 유인원 까지 갈 것도 없이 개미들을 관찰해보도록 하죠. 전문적으로 따져보지 않아도 모두가 아는 진딧물과의 공생을 볼까요. 개미는 진딧물을 보호해주고 진딧물은 개미에게 단 먹이를 제공합니다. 그런 공생관계를 가지고 있죠. 개미굴 내에 데려가진 않으니 혼합까진 아니라고도 볼 순 있겠군요. 인간은 자신의 보금자리에 다른 종—이를테면 개라던가, 고양이 같은 것 말이죠.—을 데리고 사니까요. 그럼 다른 사례를 찾아봅시다. 또 다시 개미입니다. 개미는 종이 많아 예를 들 것도 많으니 좋군요. 어째 인간성을 부정하는 것 같지만, 인간성을 정의하기 위한 고찰입니다. 일단 잎꾼개미의 사례를 볼까요? 잎꾼개미는 잎을 잘라 균사에게 먹이로 줍니다. 균사는 그걸 먹고 자라 버섯이 되고, 잎꾼개미는 그것을 먹이로 삼습니다. 물론 농사라고 봐야겠지만요. 그럼 농사가 아니라 사육을 봅시다. 사실 일부 개미 종들은 흙을 쌓고 그안에 진딧물을 키우기도 하지만, 보금자리 안에서 키운다는 느낌은 없으니 일단 넘겨보죠. 일단 개미들은 진딧물을 비롯한 흡즙 곤충들에게 우호적입니다. 대표적으로 깍지벌레, 뿔매미, 매미충이 있겠군요. 개미들은 방목을 선호하나, 깍지벌레의 경우 개미집 내부에서 키우는 경우가 꽤 됩니다. 개미들이 열대지방에서 가장 많이 키우는 가축은 뿔매미이긴 하지만, 어쨋든 깍지벌레는 개미집 내부에서 키우니까요. 하지만 닭장같이 완전 가둬놓고 키우는 사례는 없지 않냐고 물으실 수도 있겠군요. 이정도 까지 가면 좀 구질구질하다는 느낌이 없지 않긴 하지만, 이런 것들이 사회를 발전시키니 한번 찾아보죠. 아즈텍 개미는 나무에 나와있는 대롱을 더듬이로 툭툭 건드려 단물을 얻습니다. 아 대롱이 있는 구멍을 부숴보면 안에 깍지벌레가 있죠. 네 그렇습니다. 바로 닭장입니다. 더 이상 사육은 인간만의 영역은 아니란 것이겠죠. 그렇다면 반려동물을 키우는 것을 볼까요? 하지만 안타깝게도 야생에서 순전히 심신의 안정만을 위해 반려동물을 키우는 동물은 거의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반려동물을 키우는 행위는 인간성있는 행위라고 부를 수 있을까요? 하지만 반려동물의 대표주자라 할 수 있는 개와 고양이를 살펴보면 그건 또 애매합니다. 일단 개는 늑대와의 공통조상에게서 뻗어나온 동물입니다. 한때는 사냥의 보조로서, 한때는 투견이라는 이름의 구경거리로서, 지금은 심신을 안정시키는 반려동물이 된 그 동물말이죠. 그러니 인간이 문명화되기 시작했을 때 보다 훨씬 늦게 반려동물이 되었습니다. 물론 그 전에도 사냥개와 교감은 했겠죠. 그렇지 않았으면 물려죽는건 사냥꾼이었을테니까요. 조금 애매하군요. 그럼 어디 한번 고양이를 봐볼까요. 고양이의 가축화는 메소포타미아, 이집트 문명의 발상지인 비옥한 초승달 지대에서 진행되었습니다. 곡식을 갉아먹는 쥐들을 잡는 역할을 했죠. 이것이 고양이가 가축화된 이유라고 설명되는 것이죠. 마이너한 설명이긴 하지만, 단지 귀여워서 고양이를 반려동물로 키웠다는 의견도 꽤 제시되고 있습니다. 카자흐스탄 남부 잔켄트 유적지에서 애완 고양이의 뼈가 발견되었는데, 이곳에서 고양이를 키우던 오우즈족은 유목민족이라 쥐를 잡을 필요가 없어 생겨난 추측입니다. 그렇다면 반려동물을 키운다는 점이 바로 인간과 짐승을 결정 짓는 것일까요? 맞을 지도 모르겠군요. 하지만 이 사례를 보면 생각이 바뀔지도 모릅니다. '코코'라는 이름의 고릴라인데요. 이 고릴라는 수화를 배워 실제로 인간과 대화가 가능했습니다. 암컷이었던 코코는 새끼를 가지고 싶다는 얘기를 했는데, 수컷고릴라와 잘 안맞았는지 새끼를 낳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그녀를 지켜보던 패터슨 박사는 코코에게 고양이 인형을 주어 고양이를 돌보는 연습을 시킨 후 새끼고양이를 선물로 주었죠. 코코는 그 아이를 정성스럽게 돌봤지만, 6개월 뒤 고양이는 사망하고 맙니다. 코코는 '울다', '찡그리다', '문제' 라는 단어를 반복적으로 표현하며 극도로 슬퍼했다고 하죠. 그 후에도 코코는 두마리의 고양이와 친구로 지냈다고 합니다. 모성애로부터 우러나온 반응이라 할 수도 있겠지만, 반려동물을 키운 것과도 걸쳐있지 않나 싶습니다. 사회적동물들이 인간과 비슷한 환경에 노출된다면 아마 반려동물을 키우지 않을까 싶군요. 일단은 결론짓지 말고 넘어갑시다. 여러분들의 의견이 듣고 싶군요. 혹시 의견을 제시해주시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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