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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줄 이상의 글을 읽지 않는 옵지러들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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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롤을 오르락내리락한다. 인터넷 창에 담긴 글자들이 정신없이 춤춘다. 애초에 읽을 생각은 없다. 인터넷 뉴스는 읽는 게 아니라 관람(觀覽)하는 거니깐. 촐랑대는 마우스 커서를 따라 눈이 요동친다. 마음에 드는 단어 몇 개를 고른다. '중학생 3명' '쫓아가 폭행' '20대 여성'. 이 정도면 글을 이해하기 충분하다. "세상 말세다. 여자 때리는 양아치들은 미성년자라고 봐주지 말고 콩밥 먹여라!" 하고 답글을 달았더니 이내 댓글 알림이 폭주한다. "님 난독이세요? 20대 여성이 죄 없는 중학생들 때린 거잖아요. 쯧쯧."


읽기가 어렵다. 난독(難讀)이다. 읽어도 읽히지 않으니 잘못 읽는다. 오독(誤讀)이다. 대한민국 인터넷판은 난독자들의 오독으로 시끌벅적하다. 부산에 사는 함모(29)씨는 최근 가상 화폐에 2000만원을 투자했다. 그는 인터넷 난독자들 때문에 하루에도 몇 번씩 가슴이 철렁한다. "비트코인 커뮤니티에 하루에도 수십 번씩 '거래소가 완전히 폐쇄된다'나 '중국 정부가 암호화 화폐 생산자들을 처벌한다더라'는 식의 글이 올라와요. 놀라서 글을 읽어보면 기사를 잘못 이해한 경우가 많아요. 안 그래도 뉴스 하나에 코인 가격이 뒤흔들리는데, 인터넷 난독자들이 나르는 가짜 뉴스 때문에 울화통 터진 적이 한두 번이 아닙니다."

같은 글을 읽어도 하는 말이 다르다. 글 읽기가 익숙하지 않은 탓에 글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거나, 글을 제대로 읽지도 않고 스스로 이해한 것으로 착각한다. 덕분에 인터넷에서는 '세 줄 요약'이라는 독특한 예절 문화까지 생겨났다. 긴 글을 올리면 이해하지 못할 것이 뻔하니, 인터넷 커뮤니티나 페이스북에 장문을 올릴 땐 세 줄 이하로 글 전체를 요약해 앞에 달아주는 게 일종의 매너가 됐다.

네이버는 아예 읽기를 버거워하는 네티즌을 위해 인공지능(AI) 기술까지 도입한 상황. 네이버 관계자는 "세 줄 요약이 인터넷상에서 기본 에티켓이 되면서 긴 기사 읽는 것을 불편해하는 이들을 위해 AI가 기사의 핵심만 간추려 보여주는 '요약봇' 기능을 뉴스 상단에 추가했다"고 했다.

병은 아니다. 선천적으로 글을 읽고 이해하는 데 어려움이 있는 난독증(難讀症)과는 다른, 일종의 새로운 사회적 습관에 가깝다. 지금도 어디선가 서로 잘못 이해한 내용을 둘러싼 소모적인 키보드 배틀이 한창일 테다. 문맹률 세계 최저 국가라던 한국이 왜 정작 읽기와는 멀어지고 있을까.

디지털 세.대, '텍스트 혐오증' 걸리다

"네이버, 다음요? 그거 '아재'들이 쓰는 거잖아요 쌤."

중학교 국사 교사 최모(42)씨는 최근 수업 시간에 학생들에게 '안중근이 이토 히로부미를 암살한 이유를 찾아오라'는 과제를 냈다. 당연히 네이버나 다음, 구글 같은 검색 엔진을 이용해서 찾아올 거라고 생각했는데 대부분이 동영상 공유 사이트 '유튜브'에 접속해 '안중근 이토 히로부미'를 검색했다고 한다. 최씨는 "애들이 '검색 엔진으로 들어가면 글을 읽어야 해서 귀찮고, 이해가 빨리 안 된다'고 하더라. 걔들에겐 유튜브가 일종의 검색 엔진이다"고 했다.

요즘 10대들에겐 이미지와 영상이 글보다 더 익숙하다. 텍스트는 그저 거들 뿐이다. 2014년까지만 해도 한국인이 PC로 네이버에서 가장 많이 검색한 단어 부동의 1위는 '다음'이었다. 네이버와 다음을 오가며 정보를 검색하는 이들이 그만큼 많았다는 뜻이다. 하지만 2015년부터 '유튜브'가 다음을 제치고 검색어 순위 1위를 차지한다. 정보를 찾을 때 텍스트를 기반으로 한 검색 엔진이 아니라 영상을 기반으로 한 유튜브를 찾는 이들이 많아졌음을 보여준다.

텍스트와 멀어지니 문장 이해력은 자연스레 떨어진다. 일선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는 교육자들은 그 문제를 실감한다. 한우리독서토론논술 강사 임미진(43)씨는 "아이들이 영상이나 웹툰처럼 이미지와 함께 제공되는 짧은 문장에 익숙해지다 보니 긴 문장 읽기를 버거워한다"며 "글을 소리 내 읽어보라고 하면 단어 단위로 끊어서 읽느라 맥이 뚝뚝 끊기는데, 문장 전체를 단번에 읽고 이해하는 능력이 부족하기 때문이다"고 했다. 임씨는 "스마트폰이 나오기  10년 전만 해도 이런 현상이 없었다. 이것 때문에 요즘 선생님들 사이에서 교육 방법에 대한 고민이 많다"고 했다.

난독증 전문가인 박세근 스카이소아청소년과의원 원장은 "아이가 선천적 질병인 난독증은 아닌데 글을 잘 못 읽는 것 같다며 병원을 찾는 부모가 많아졌다"고 했다. 박 원장은 "아이들이 스마트폰에 익숙해지면서 이미지와 영상을 주요 정보로 여기고, 텍스트는 이해하기보단 훑고 넘어가는 습관을 갖게 된다"며 "깊은 사고와 추리를 하지 않고 결국 글을 읽고 쓰는 능력이 점점 퇴화한다"고 했다.

난독 유발 사회

비단 디지털만의 문제는 아니다. 전문가들은 이해보다 암기를 우선시하는 한국의 오랜 교육 방식도 지적한다. 학교 성적을 잘 받으려면 단순 암기하면 되니 글을 이해하고 전체 구조를 파악하는 과정을 불필요하게 여기게 됐다는 얘기다. 연습장이 너덜너덜해질 정도로 교과서 내용을 그대로 베껴 적으며 암기하는 '깜지' 문화가 대표적이다.

'학교 속의 문맹자들' 저자인 엄훈 청주교대 교수는 "어렸을 때부터 문장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채 읽기를 반복한다"며 "그러다 보니 단어들 자체의 의미에만 집착하게 되고 글을 보는 시야가 점점 좁아지는 '터널 비전' 현상이 심화된다"고 했다.

자신이 원하는 자료만 편식해서 받아들이는 '확증 편향'도 난독 사회의 원인으로 지적된다. 지난해 8월 민주당 박용진 의원이 청와대 점심 모임에 다녀온 뒤 페이스북에 '청와대 밥은 부실해도 성공한 정부를 만들겠다는 당·정·청의 의지는 넘쳐났다'는 한 줄을 올렸다가 몇몇 네티즌에게 한바탕 욕을 먹었다. 현 정권의 성공을 다짐하는 내용이었는데, '청와대 밥이 부실했다'는 농담 때문에 현 정권을 비판하는 내용으로 오해를 받은 것이다. 윤상철 한신대 사회학과 교수는 "자신에게 유리한 정보만을 받아들이려고 하는 사람들의 '의도적 오독'이 난독 사회를 부추기는 경향이 있다"며 "특히 빠르게 정보를 습득해야 하는 인터넷에서는 이러한 확증 편향 현상이 더 심각하다"고 했다.

新문맹시대, 글자는 읽는데 글은 이해 못해

한국은 글을 읽거나 쓸 줄 모르는 문맹이 거의 없는 국가다. 1945년 광복 당시 문맹률은 77.8%였다. 대통령 선거나 국회의원 선거 때 후보자의 기호를 한글이나 숫자가 아니라 작대기 개수로 구분해야 할 정도로 글을 읽지 못하는 이가 많았다. 1954년부터 정부가 대대적인 '전국문맹퇴치운동'을 벌이고 초등학교 교육이 의무화되면서 상황은 나아졌다. 문맹률은 1970년 7%로 급격히 떨어졌다. 이후 문맹률이 사실상 제로에 가깝다는 이유로 더는 문맹에 대한 논의가 이뤄지지 않았다. 세계 최고 교육열을 보여주는 한국의 자랑거리였다.

하지만 글자를 읽을 수 있다고 글을 이해하는 건 아니다. 안타깝게도 글을 읽고 제대로 이해했는지를 측정하는 문해율을 따져보면 한국의 자부심은 깨진다. 2014년 국가평생교육진흥원에서 실시한 '성인 문해 능력 조사'(18세 이상 성인 남녀 4057명 대.상) 결과 '복잡한 일상생활의 문제 해결에 미흡한 문해력을 가진 이'가 16.2%에 달했다. 6%는 '기본적인 읽고 쓰고 셈하기가 가능하지만 일상생활을 하기엔 미흡한 수준'이었다. 6.4%는 '일상생활에 필요한 기본적인 읽고 쓰고 셈하기가 불가능한 수준'에 해당했다. 셋을 합치면 28.6%. 성인 10명 중 3명이 미흡한 문해력을 가졌다는 얘기다.

읽는 것이 힘, 읽어야 산다

"앞으로 신분이나 권력, 돈에 의한 '계급사회'가 아니라 독서 습관이 있는 사람과 독서 습관이 없는 사람으로 양분되는 '계층사회'가 도래할 것이다."

일본의 교육 전문가 후지하라 가즈히로는 2016년 펴낸 책 '책을 읽는 사람만이 손에 넣는 것'에서 문해력을 미래의 핵심 능력으로 선정했다. 4차 산업혁명 시대에는 정보의 유통기한이 짧다. 끊임없이 새로운 정보를 선별하고 편집하기 위해선 높은 문해력이 필수이고, 읽기 능력이 없으면 자연스레 흐름을 따라가지 못해 도태될 수밖에 없는 게 현실이다. 그런데 되레 점점 책을 읽지 않는 사람들이 늘어나며 '독서'를 기준으로 계층이 나눠지고 있다는 것이다.

후지하라의 논리에 따르면 한국의 문제는 심각하다. 문화체육관광부에 따르면 2015년 우리나라 성인 독서율은 65.3%에 그쳤다. 성인 3명 중 1명 이상이 1년 동안 책을 단 한 권도 읽지 않았다는 얘기다. 2013년 OECD가 실시한 국제 성인역량 조사(PIACC)에서 한국의 16~65세 언어능력 수준은 273점(500점 만점)으로 11위였다. 독서율이 높은 일본이 296점으로 1위였고, 핀란드(288점), 네덜란드(284점) 순이었다.

전문가들은 난독 사회를 극복하는 첫걸음은 결국 독서라고 한다. 장은수 편집문화실험실 대표는 "글을 이해하는 데는 글자를 읽는 것만큼이나 구조를 읽어내는 능력이 중요한데, 평소 신문이나 책과 같이 긴 글을 읽는 습관을 들이지 않으면 이 능력이 퇴화한다"며 "글의 구조를 읽는 훈련이 잘된 사람은 빠르게 읽어야 하는 인터넷 글도 쉽게  이해하고 오독하는 경우가 적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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