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51년, 18세의 나이로 오스만제국의 술탄이자 파티샤로 오른 젊은 청년이 있었다.이 청년은 훗날 정복군주로 불리는 메흐메트 2세이다.
패기로운 젊은 청년의 칼은 2000년를 존속한, 한때 영국남부, 이베리아반도, 동유럽, 소아시아, 북아프리카에서 제국을 이뤘던 비잔티움제국을 향하였다. 하지만 그 대제국은 더 이상 없었다. 그들은 자신들의 발원지인 이탈리아 반도조차 지배를 못하였으며, 제국이라는 명칭이 어울리지 않게 그들의 영토는 발칸반도 일부에 국한된 몰락한 상태였다.
메흐메트 2세는 15만으로 추정되는 대병력과 대함대, 그리고 당시에는 최첨단 무기였던 우르반거포까지 동원하여 요새 콘스탄티노폴리스를 포위한다.
하지만 15만의 대군을 막아서는건 난공불락의, 정공법으로는 함락된적이 없는 테오도시우스 성벽이었다. 테오도시우스 성벽은 9m의 외벽, 12m의 내벽과 20~70m마다 배치되어있는 총 96개의 방어탑, 그리고 해자까지 갖춘당시의 마지노선이였고 이 요새는 용병, 외국인등을 포함해 7천명 정도의 병력이 지키고 있었다.
개전
오스만군은 우르반 거포를 비롯한 공성용 대포로 성벽을 포격하며 공성전이 개전되었다. 하지만 정확도가 옵붕이들의 스킬샷처럼 형편없어 그리 좋지 못한 결과를 내었고 이외의 여러 시도들도 실패하였다.
한편 오스만해군은 동로마제국의 금각만으로의 식량보급을 차단하지 못하였고 봉쇄망이 뚫리는등 포격과 마찬가지로 해군이 좋지 못한결과를 내고있었고 이에 빡친 메흐메트2세는 해군 제독을 교체하고 말도 안되는 듯한 묘책을 낸다. 당시 콘스탄티노폴리스의 금각만(바다)은 방어용 사슬이 쳐져있어 동로마 함대를 직접적으로 공격하지 못하는 상황이였다. 메흐메트 2세는 이러한 상황을 타개하기위해 육로로 함대를 옮기는 묘책을 세웠고 이를 실행하였다.
결과는 성공이였다. 오스만제국은 금각만을 통한 동로마로 향하는 보급을 차단할 수 있었고 이는 동로마의 물자를 감소시켜 사기를 떨어트렸다.
한편, 오스만군은 난공불락의 성벽 앞에서 계속 고전하였다. 25000명의 병력을 투입했지만 격퇴당하고 파놓은 갱도도 파괴당하고 정예병 예니체리도 계속 갈려나가는 등의 손실이 계속 발생하자 초조해진 오스만은 항복요구를 하나 거절당한다. 두 국가는 총력전이 다가옴을 직감하고있었다.
5월 24일, 보름달이 뜨던날에 개기월식이 있었다. 콘스탄티노폴리스의 상징은 달, 달이 가려졌다. 또한 서로마 제국은 건국자 로물루스와 이름이 같은 로물루스황제때 멸망하였고, 동로마의 황제는 동로마제국의 초대황제로 여겨지는 콘스탄티누스 대제와 이름이 같았다. 불길한 징조였다.
5월 26일, 오스만제국은 가능한 모든 병력을 배치하고 공세계획을 수립하는 등 총공세 준비를 하였다.
5월 28일, 오스만제국은 공세 성공을 위해 대규모 이슬람 의식이 거행하고 병사를 독려해 사기를 증진시킨다. 같은날 동로마 황제는 수비군과 지휘관을 모아서 연설을 한다. "죽음을 감수할 명분에는 크게 4가지가 있다. 신앙, 고향 , 가족, 조국. 이제 그대들은 목숨을 걸고 이들을 지킬 준비를 해야한다. 짐도 목숨을 버릴 준비가 되었다."
최후의공세
오스만군은 콘스탄티노폴리스에서 가장 약하다고 생각되는 블라혜르네(Blachernae)방면을 집중공격한다. 오스만군은 예니체리를 모두 투입하는 등 총공세를 진행하였고 이에 동로마군의 수비대장이 부상을 입고 결국 비밀쪽문이 열린다.
기회를 노리던 오스만군은 이 문으로 돌진해 방어탑을 점령하고 깃발을 세운다. 이 광경을 본 동로마군은 항복, 투신, 도망치는등 혼란에 처하게되고 이러한 아비규환에서 동로마 황제는 단신으로 병사들과 오스만군에게 돌격해 생을 마감했다고 전해진다. 시민들은 노예로 팔려나간다. 2200년 제국의 끝이였다.
기원전 753년, 건국된 로마는 유럽, 지중해, 소아시아, 아프리카 일대에 건설된 대제국이었다.
그들의 뛰어난 기술력은 현대에도 놀라게한다. 그들은 콘크리트를 사용해 판테온, 콜로세움, 수도교등을 지었고 이는 1500년이 넘어도 현재에 남아있을 정도이다.
로마는 군에 입대하면 자국의 시민으로 인정해주는 포용적인 제도를 지니고 있었으며 당시에 획기적인 통치법, 제도, 행정체계를 가지고 있었다.
허나, 이러한 국가도 결국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게 되었다.